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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문화원

문화와 역사

문화와 역사

역사

조선시대

거창군의 조선시대 3.경제

ㆍ내용
거창의 역사적 변천과정

4. 조선시대

 

[경제]

15세기에 완성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따르면, 거창현의 호수(戶數)와 인구는 505호 1,640명, 안음현은 481호 793명, 삼가현은 307호, 2,027명으로 나타난다. 반면 18세기 간행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거창도호부 호수와 인구를 4,263호 20,031명[남 8,892명, 여 11,139명]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안의현은 4,565호 19,311명[남 8,555명, 여 10,756명], 삼가현은 3,085호 17,131명[남 8,046명, 여 9,085명]으로 기록하고 있어, 인구가 큰 폭으로 증가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비록 『세종실록지리지』의 인구 통계가 고려 후기 어지러웠던 국내외 정세, 조사상의 한계 등이 반영되었다 할지라도, 조선 후기까지의 인구 증가는 주목할 만하다. 여기에는 조선 전기 이래 꾸준히 전개된 농업 기술의 발달과 농지 개간 등 경제 수준의 향상이 중요한 배경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거창현의 땅은 기름지고, 기후는 따뜻하며, 간전(墾田)이 3,423결인데 논이 약간 적다고 하였다. 안음현은 땅이 기름지고 메마른 것이 서로 반반씩이며, 기후는 춥고, 간전(墾田)이 1,793결인데, 역시 논이 약간 적다고 하였다. 삼가현은 땅이 기름지고, 기후는 따뜻하며, 간전(墾田)이 1,913결이나 논은 절반이 채 되지 않는다고 기록해 놓았다. 한편, 『여지도서』에는 거창도호부의 전결이 한전(旱田) 2,089결, 수전(水田) 2,856결, 안의현의 전결이 한전 920결 92부 4속, 수전 1,576결 58부 5속, 삼가현의 전결이 한전 775결 18부 2속, 수전 1,345결 34부 7속으로 나타난다. 조선 전기에 비해 전결의 수가 증가하였으며, 논농사인 수전의 비중이 높아졌다. 이러한 경향은 조선 전기 이후 지속된 향촌 개발과 새로운 농업 기술의 보급에서 비롯된 것이다. 거창 지역의 재지 사족들은 읍치(邑治)를 떠나 비교적 미개발 지역이었던 임내 지역을 개발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거느리고 있던 인력[소작농과 노비]을 동원해 황무지를 개간하고, 새로운 농업 기술인 이앙법(移秧法) 실시에 필요한 제언(堤堰)·보(洑) 등의 수리(水利) 시설을 확보해 나갔다. 이로 인해 농업 생산량이 증대하였으며, 상품 작물 재배를 견인하게 된다. 조선 전기 거창 지역의 토산물로는 벼·조·기장·감·대추·배와 은구어(銀口魚)가 있었고, 꿀·밀[황랍(黃蠟)]·호도(胡桃)·석이(石茸)·칠·종이·자리[석(席)]·여우 가죽·삵 가죽·노루 가죽을 정기적으로 진공(進貢)하였다. 또한 도기소(陶器所) 한 곳이 고천리(古川里)에 설치되었다. 조선 후기의 토산물로는 꿀·오미자(五味子)·감·밤·은구어·표고버섯·송이버섯·잣·사향·웅담·당귀·버섯이 있었으며, 진공되는 물품으로는 인삼·백봉령(白茯苓)·복신(茯神)·산약(山藥)·적작약(赤芍藥)·백작약(白芍藥)·한홍시(旱紅柹)·감국(甘菊)·구기자·감나무·하눌타리 씨·백청(白淸)·당귀·시호(柴胡)·적봉령(赤茯苓)·연교(連翹)·백술(白术)·곶감·시설(柹雪)·홍시·납육(臘肉)·꿩이 있었다. 조선 후기 농업 생산량이 증가하고 상품 작물이 재배됨에 따라 지방 장시(場市)도 발생하게 된다. 이때 장시는 보통 5일장으로 운영되었다. 1832년경 편찬된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에 수록된 조선 후기 거창 지역의 대표적인 장시로는 영천 장시(瀯川場市)[1·6일]·양무당 장시(養武堂場市)[3·8일]·가조 장시(加祚場市)[4·9일]가 있다. 조선 후기 안의현의 장시 중에는 고현장(古縣場)이 지금의 거창군에 소재하였었다.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거창문화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