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역사
문화와 역사

거창군
거타지 (居陀知)
거타지 (居陀知)
거타지(생몰 미상). 통일신라시대 제51대 진성여대왕(眞聖女大王, 재위887~897년) 대의 거타 즉, 거창사람이다. 「거타지」는 당나라 사신으로 떠나는 진성여왕의 막내아들 아찬(阿餐) 양패(良貝)의 50명 호위 궁사 중 한 사람이다.
「거타지」의 이름은 「거타」+「지(知)」의 구성이다. 여기서 앞부분의 「거타」는 출신지명이고, 뒷부분의 「지(知)」는 옛 존자의 이름에 붙이는 남성 존칭 접미사이다. 먼저, 「거타」는 거창의 옛 명칭 “거열(居列) 혹운 거타”의 ‘거타’와 같으므로 이것은 지역 명칭으로 간주된다. 다음 「지(知)」는 신라 17관등 중 하급인 13등위의 「사지(舍知)」, 15등위 「대오지(大烏知)」, 16등위 「소오지(小烏知)」, 17등위 「선저지(先沮知)」에 드러나는 남성존칭 접미사이다. 이로 미루어 보면 「거타지」는 이들과 유사한 등위의 신분을 가진 남성인 것이다. 신라 대야성 도독 김품석(金品釋)의 휘하에서 용맹을 떨쳤던 죽죽(竹竹) 장군의 벼슬이 ‘사지(舍知)’였던 것과도 견주어 보게 된다. 종합하면 「거타지」라는 명칭은 지역 명칭 ‘거타’ 와 존칭 ‘지’를 합한 것으로서 ‘거타’라는 지역을 대표하는 존자의 명칭인 것이다. 특히 『삼국유사』의 관련 기사에서「거타지」를 “군사(軍士)”라 했음으로 그는 곧 ‘거타 장군(將軍)’ 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명궁사 「거타지」는 오늘날 군대식으로 말하면 ‘거창(출신의) 장군(將軍)’인 것이다.
아찬(阿餐) 양패(良貝)의 호위 궁사 「거타지」와 관련되어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전하는 이야기의 대강은 이러하다. 사신 양패공의 일행을 태운 배가 서해를 항해하여 당나라로 가던 중 풍랑을 만나 곡도(鵠島: 骨大島)라는 섬에서 열흘간 머물게 되었다. 이에 양패공이 근심하여 점을 치니, ‘섬에 있는 신지(神池)에 제사를 지내는 게 좋겠다.’ 함으로 그에 따라 못 위에 제물을 차려 놓았다. 그날 밤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말하기를 “활 잘 쏘는 사람 하나를 이 섬에 남겨 두면 순풍을 얻을 것이요.” 하였다. 이에 양패공은 일행과 의논하여 50명 궁사의 이름을 적은 나무 조각을 물에 띄웠더니 그 중 군사(軍士) 「거타지」의 이름이 물에 잠겼으므로 그를 남겨두고 일행은 순풍을 얻어 당나라로 떠났다.
섬에 혼자 남은 「거타지」 앞에 못 속에서 한 노인이 나타나 말하기를 “나는 서해약(西海若)이요. 중(僧) 하나가 해가 뜰 때면 늘 하늘에서 내려와 다라니(陁羅尼)의 주문을 외우면서 이 못을 세 번 돌면 우리 부부와 자손들이 물 위에 뜨게 되오. 그러면 그 중은 내 자손들의 간을 빼어 먹는 것이요. 그래서 이제는 오직 우리 부부와 딸 하나만 남아 있을 뿐이오. 내일 아침에 그 중이 또 다시 올 것이니 그대는 활로 쏘아 주시오” 하였다. 이에 「거타지」는 말하기를 “활 쏘는 일이라면 나의 장기입니다.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하였다.
이튿날 아침 동쪽에서 해가 뜨자 과연 중이 나타나 주문을 외면서 늙은 용(龍: dragon)의 간을 빼먹으려 하였다. 이에 때를 기다리던 「거타지」가 활을 쏘아 맞추니 중은 이내 늙은 여우로 변해 땅에 떨어져 죽었다. 이에 노인이 나타나 치사를 하고 “공의 은덕으로 내 생명을 보전하게 되었으니 내 딸을 아내로 삼아주기를 바라오” 하였다. 「거타지」는 “따님을 나에게 주시고 저버리지 않는 다면 참으로 원하는 바입니다.”라고 하였다. 노인은 그 딸을 한 가지의 꽃으로 변하게 해서 「거타지」의 품속에 넣어 주고 두 용에게 명하여 「거타지」를 모시고 사신의 배를 따라 호위하여 당나라에 들어가도록 했다. 이렇게 「거타지」는 중(僧)으로 변신한 늙은 여우를 활로 쏘아 물리치고 당나라 사신을 호위하는 임무를 훌륭히 마쳤다.
고국 신라로 돌아와 서해약(西海若)이 품속에 넣어 주었던 꽃가지를 끄집어내어 아름다운 여자로 변하게 해서 오래토록 함께 행복하게 살았다. 이렇게 무공과 사랑이야기가 곁들어진 고대 거창 출신의 명궁사 「거타지」를 만나게 된 것이다.
【참고문헌】『삼국유사(三國遺事)』, 卷 第二 紀異 第二
오 필 제 / 거창향토사연구소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