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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군

희랑대사 (希朗大師)

ㆍ내용
고려 태조의 왕사
ㆍ시대
고려
ㆍ출생지
거창 (추정)
ㆍ작성자
김 칠 성 / 거창향토사연구소 연구위원

희랑대사(希朗大師)
- 고려 태조의 왕사 -

 

희랑대사(希朗大師)는 거창 주상면 출신으로 해인사 고승 중의 한 사람이다. 개산조(開山祖) 순응(順應), 이정(利貞) 두 조사(祖師)와 3대 결언대덕(決言大德)의 뒤를 이은 4대 주지이다.

대사는 고려 태조 왕건의 왕사(王師)로서 초창기 가야산 해인사를 일신 중건하여 그 도화를 크게 떨쳤다. 해인사 희랑대에서 수도 하였으며 시호(市虎)는 해인존사원융무애부동상적연기상유조양시조대지존자(海印尊師圓融無碍不動常寂緣起相由照揚始祖大智尊者) 이다.

대사는 신라 51대 진성여왕 3년(889) 기유(己酉) 3월 21일 거창 주상면 성기리(聖基里) 희동(希洞)에서 출생하여 고려 4대 광종 17년(967) 병인(丙寅)에 78세로 입적하였다.

 

대사가 태어나던 때의 신라는 천년 왕조의 말기 온갖 혼란이 거듭되던 시기였다. 진성여왕 2년(888)에는 각간 위홍(魏弘)이 죽었고, 시정을 비방하는 글이 나붙어 대야주(합천)에 사는 은자거인(隱者巨人)을 하옥시켰으며 3월에는 일식과 왕의 병환이 있었다. 그리고 대사가 태어나던 해에는 조정의 공부(貢賦) 재촉에 반대하여 사방에서 도둑의 봉기가 일어나 왕 5년(891)에는 마침내 북원(原州)에서 양길(梁吉)의 부하 궁예(弓裔)가 10여 군현을 습격하였고 왕 6년(892)에는 견훤이 완산주(전주)에서 일어나 후백제를 세움으로서 신라는 큰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국정의 쇄신을 건의하는 최치원의 시무(時務) 10조가 상주되니(894) 왕은 이를 가납하고 그를 아찬(阿澯)으로 삼기도 하였다. 바야흐로 신라의 종말이 시작되는 혼돈의 시기였다.

대사의 탄생지 주상면 성기리(聖基里)는 곰이 누워있는 형국의 와웅산(臥熊山, 600m) 남쪽 ‘성스러운 터’로서 그곳에는 대사의 탄생지로 전하는 ‘희터(希洞)’가 있다. 희터는 북쪽 웅양면에서 흘러내리는 미수천(美水川)이 삼산이수(三山二水) 봉황대(鳳凰臺)로 돌아 흐르기 직전, 성기리의 가장 남쪽 산 속에 들어앉은 작은 마을이다. 주변에는 와웅산 동쪽 불영산(佛靈山, 650m)의 보광사(普光寺)와 동쪽 가북면과 경계를 이루는 보해산(普海山, 911m)의 보해사(普海寺)를 비롯한 여러 암자가 있었다.

 

이러한 주변 산천의 여건 속에서 대사는 주씨(朱氏)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전한다. 성기리에 지금은 주씨가 살고 있지 않으나 옛날에는 신안주씨(新安朱氏) 정숙공파(正肅公派) 후손들이 다수 살았던 것으로 전하며 대사는 이들 가문의 조상이라 전한다. 그러나 신안주씨대동보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주씨는 중국 건양현(建陽懸)에서 살던 주부자(朱夫子)의 증손 휘(諱) 잠[潛, 號 淸溪]이 고려 고종 11년(1224)에 전라도 금성(錦城)에 배를 타고 건너와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보다 300여 년 전에 성기리에서 주씨 가문의 아들로 대사가 태어났다고 전하니 무언가 착오가 있는 듯 하다.

대사의 출생지로 전하는 10여 호의 작은 희동마을은 대사의 이름자와 같은 ‘희(希)’자를 사용하고 있어 대사의 출생지일 가능성이 점쳐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곳에서 탐문해 보면 무상한 세월 탓인지 대사의 출생에 대해 아는 이가 아무도 없다. 오히려 원성기(元聖基)마을에 대사와 관련된 전설이 있고 그곳을 대사의 출생지로 말하기도 한다.

 

주씨는 옛 부터 원성기 마을에서 누대를 살았다던가 또는 그 곳 윗 담의 서쪽으로 산줄기 끝에 ‘주(朱)부처’를 모신 ‘성인당(聖人堂)이 있었는데 매년 2월 초 아흐렛 날 후손들이 제향을 올렸으며 지금도 그 곳에서 깨어진 기와장이 나온다는 것, 그리고 제사에 사용할 나락(볍씨)을 햇볕에 내어 말리는데 새들이 날아와 나락을 쪼아 먹으면 이내 곧 눈이 멀어 날지를 못했다던가, 마을 앞 냇물을 건너는 징검다리를 주부처가 놓았는데 큰 홍수가 내려와도 끄떡없이 견뎠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부모의 보살핌 속에 어린 시절을 보낸 대사가 어떤 연유로 입산하게 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대사가 15세 되던 해(904)에 가야산 해인사에 입산하였다고 전하니 이 때의 해인사는 신라 애장왕 3년(802) 10월 순응(淳應), 이정(理貞) 두 스님에 의해 창건 된지 백여 년이 되는 해였다.

최치원의 「신라 가야산 해인사 결계장기(新羅伽倻山海印寺結界場記)」에 의하면 해인사는 창건 당시 터가 험하고 규모가 작았는데 95년이 지난 효공왕 1년(897) 가을에 다시 중창할 것을 합의하고 90일 동안 참선한 뒤에 3겹의 집을 세우고 4급의 누(樓)를 올려서 사역을 확정했다고 한다. 해인사에 들어간 희랑은 불법에 귀의하여 지족암(知足庵) 토굴 등에서 수도(修道) 증진하면서 십여 년이 흘렀다. 그러나 나라는 아직도 안정을 되찾지 못하고 전란만 계속되고 있었다.

 

해인사 일주문에 다다르기 전 남쪽으로 약 50m 도로변에 높이 약 3m의 석탑이 서있는데 「묘길상석탑(妙吉祥石塔)」이다. 해인사 들머리 길가에 서 있는 작은 돌탑이라 큰 관심을 끌지 못했는데 1966년 여름 석탑 전문 절도단으로부터 회수된 4매의 지석(誌石)으로 인해 비로소 주목을 끌게 되었던 곳이다. 묘길상석탑(妙吉祥石塔)은 건녕(乾寧) 2년에 건립하였으니 신라 진성여왕 9년(895)이다.

탑기(塔記)는 최치원(崔致遠) 선생이 지었으며(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당나라 19대 소종이 중흥할 즈음 전쟁과 흉년 두 재앙이 중국에서는 그쳤으나 신라 땅에는 악한 중 악한 자들이 사방에서 나타나 험악하였으므로 백성들이 굶어서 죽거나, 전쟁으로 인하여 죽은 시체들이 들판에 즐비하였다. 해인사의 대덕 훈혁(訓衋)스님이 이러한 사실을 가슴 아프게 여겨 부처님께 자비를 구하고 대중에게 청하고 권유하여 각 각 벼 한 단씩을 희사케 함으로써 여기 옥돌 삼충을 세웠으니, 그것은 법륜의 바퀴가 오래 구르게 함이며 또한 호국을 으뜸으로 삼으니, 곧 그 가운데 특히 원통하게 횡사하여 고해에서 헤매이는 원혼들을 천도하면서 제사를 지내고 그들의 명복을 빌어 길이 길이 여기에 쉬게 하리라.” -가야산해인사지-

이 탑은 북쪽에서 발흥한 궁예와 서남쪽 견훤의 싸움에 시달리며 굶주리고 다쳐 죽은 병사와 백성들의 원혼을 위로하기 위해 세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 해인사의 훈혁(訓衋) 대덕이 농촌을 돌아다니면서 벼 한 다발 씩 희사를 받아 군량에 충당하고 그 나머지로 삼층석탑을 세웠는데 석탑건립의 가장 큰 목적은 호국을 으뜸으로 삼았다. 이는 전몰장병과 국태민안을 위한 호국 석탑의 효시로서 우리나라의 호국불교 사상이 이미 신라 때부터 자연발생적으로 시작되었다.

또한 함께 출토된 「오대산사 길상탑사(五臺山寺吉祥塔詞)」지석에는 아래와 같은 치군(緇軍·僧軍)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도 적혀있다.

“탁한 운수가 서쪽에서 신라에 미쳐 10년 동안이나 못된 무리들이 승가를 괴롭혔구나. 부처님은 이미 열반에 드셨고, 출가 제자들이 불도를 비록 닦았으나 어찌 마(魔)를 면할 수 있을 소냐. 그러므로 어제는 반딧불로 길 밝히는 것을 기뻐하더니 지금은 황량한 이곳에 흐트러진 해골이 발에 걸림을 슬퍼하노라. 그래서 이곳 길상처에 그대들을 위하여 탑을 세우노라.”


탁한 운세가 서쪽에서 미쳤다 했으므로 그것은 곧 견훤세력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들 못 된 무리들이 승가 괴롭히기를 10년인데 황량한 들판에는 흐트러진 해골만 가득하였다. 그리고 「해인사호국삼보전망치소옥자(海印寺護國三寶戰亡緇素玉字)」지석에는 56명의 승려와 속인의 명단이 열기되어 있는데 이는 해인사를 장악하려는 자에 대항하여 싸우다 전사한 사람들의 명단인 것이다.

두 지석 내용으로는 이 대결의 피아를 정확히 구분할 수가 없다. 그러나 ‘탁한 운세가 서쪽에서 미쳤다’ 또는 ‘어제는 반딧불로 길 밝히는 것을 기뻐하더니’ 라는 구절에서 외부의 적과 관련되어 있음을 암시받게 되는데 즉, 견훤을 등에 업은 남악파(南岳派)와의 이념 싸움이었으리라 생각된다.

화엄종 법손 균여대사(均如大師)의 「균여전(均如傳)」은 희랑대사의 탄생을 다룬 강탄영험분(降誕靈驗分)을 비롯한 열 부분으로 나뉘어 대사 행장을 기록하고 있다. 그 중 네 번째 「입의정종분(立義定宗分)」에는 다음과 같이 해인사 내 남ㆍ북악파 간의 갈등 상황을 기록해 놓았다.

“옛날 신라 말년에 가야산 해인사에 두 분의 화엄사종이 있었다. 한분은 관혜공(觀惠公)으로 백제의 우두머리가 된 견훤의 복전(福田/귀의할 만한 덕 높은 승려)이었고, 다른 한분은 희랑공(希朗公)이니 우리 태조대왕의 복전이었다. 공이 신심 받아서 향화(香花) 원을 맺기를 청하였으나 원이 하마 다른지라 마음이 어찌 같으랴. 그 문도에게는 점점 물과 불처럼 번지었으니 하물며 법미(法味)이겠느냐. 시고 짠 맛을 각기 받았으니 이 폐단을 제거하기 어려움은 이미 오래 되었다. 더욱 시체의 무리들이 혜공(惠公)의 법문을 일러 남악(南岳)이라 하고 랑공(朗公)의 법문을 일러서는 북악(北岳)이라 하였다.”

 

합천 해인사는 신라 말기부터 이미 희랑(希朗), 관혜(觀惠) 두 화엄사종을 중심으로 이념적 대립에 빠져 서로 상쟁하고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즉, 해인사를 장악하려는 전남 구례 화엄사를 근거로 한 관혜공(觀惠公)의 남악파(南岳派)와 희랑공을 중심으로 하는 북악파(北岳派)로 나뉘어 대결했던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대립은 「묘길상석탑」 지석에 드러난 바와 같이 희랑대사가 해인사에 입산하기 이전 진성여왕 대부터 그 근원이 시작되었는데 신라말기 희랑대사 때에 이르러 더욱 극명하게 대립 되었던 것이다. 바야흐로 왕국의 종말기 세력 재편의 소용돌이가 이곳 산곡의 수도승들에게도 불어 닥친 것이었다.

 

경명왕 4년(920) 견훤은 군사 1만을 거느리고 합천의 대야성(大耶城)을 함락하고 이어서 군사를 무주 진례성(進禮城)까지 나아가게 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4년 후인 경애왕 원년(924) 12월에는 견훤의 군사가 거창 등 주변의 20여성을 공취하였으니 서부 경남일대가 모두 견훤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고 희랑대사가 수도하던 가야산 해인사도 예외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어서 왕 4년(927)에는 근품성(近品城: 尙州)과 고울부(高鬱府:永川)를 습격한 견훤이 10월에 갑자기 신라 왕도를 침입하여 천년 사직을 유린하였는데 이 때가 견훤 세력이 가장 크게 발흥하던 시기였다.

「신라 가야산 해인사 고적(新羅伽倻山海印寺古籍」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 신라 말기에 승통 희랑 이 절에 주지(住持)하여 '화엄신중삼매(華嚴神衆三昧)'를 얻었을 때에, 고려 태조가 백제의 왕자 월광과 싸웠는데, 월광은 미숭산에 있으면서 식량이 넉넉하고 군병이 강하여 태조의 힘으로는 대적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해인사에 들어와서 낭공을 스승으로 섬기면서 백제를 물리칠 방법을 청하였다. 이에 낭공은 용적군야차왕(勇敵軍夜叉王)을 보내어 돕게하였다. 월광은 금갑(金甲)을 입은 신병이 공중에 가득함을 보고 두려워 항복하였다.”

이 기록은 아마도 신라 왕도를 유린하고 돌아가던 견훤 군사와 왕건이 해인사 부근의 합천 야로 미숭산(美崇山)에서 대치하였던 한 때의 상황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위 기록 중의 백제 왕자 월광은 누구인가? 견훤의 아들 중에는 그러한 사람이 없다. 그것은 아마도 전투가 일어난 합천군 야로면 월광동에 소재한 월광사(月光寺)에 모신 가야국 왕자 월광태자(月光太子)를 잘못 혼동한 듯하다. 여하튼 미숭산을 근거로 한 견훤 세력을 만나 위기에 처한 왕건이 해인사의 화엄사종 북악파 종주 희랑대사에게 구원의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이에 희랑대사는 더 이상 불문곡직(不問曲直) 떨치고 일어나 승병을 동원하여 왕건을 지원하였다. 이로 인해 왕건이 승리를 하였다.

 

왕건의 승리는 곧 북악파의 승리이기도 했다. 마침내 남·북악파 간의 오랜 대립도 종지부를 찍고 해인사는 희랑대사를 중심으로 결집케 된 것이다.

이후 고려를 건국한 왕건은 희랑대사를 스승으로 모시고 전 오백 결을 절에 헌납하여 옛 사우(寺宇)를 새로이 중건케 하였다. 이로서 해인사는 개산 후 제4대 희랑조사에 이르러 본격적인 면모를 갖추게 되었으니, 산형은 천하에 절승하고 지덕은 해동에 으뜸이니 가히 정수할 만한 곳이며 복리를 누릴 곳이니 이에 비교하여 달리 어떻다 일컫겠는가?

그리고는 나라의 중요한 문서를 이곳에 두고 병사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 봄·가을로 사천왕법석을 베풀었고 연말에도 기원을 베풀게 하였는데 재료(齋料)는 진주, 합천, 흥안부(興安府:星州)에서 맡아 그 영내에서 거두어 올리게 하였다. 집의 수리도 전과 같이 하고 각 고을의 문서 당직은 가조현에서 두 사람, 야로현에서 두 사람이 가담케 하였으며, 불유(佛油)는 야로현사에서 일 년에 서 말씩 내어 늘 불이 꺼지지 않게 하였다. 실로 희랑대사의 높은 도력을 흠모하는 고려 태조 왕건의 희사에 의한 최초의 대규모 중창불사였으니 그 때가 바로 서기 930년경이었다.

희랑대사가 해인사에 입산한지 이십여 년 만에 일어난 불사로서 초창기 해인사 중흥의 일대 전기(轉機)가 된 것이다. 해인사 중흥의 기틀을 마련하기까지 대사는 초창기 힘든 증진수도의 역경 속에서도 남·북악파간의 생사를 넘나드는 이념 대립의 환란을 지혜롭게 극복해 왔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대사의 가슴에는 멍이 들고 마침내는 구멍이 뚫리는 고통의 흉혈국인이 되었으리라.

희랑대(希朗臺)는 희랑대사가 수도한 곳이다. 해인사 큰 절(大寂光殿)과 백련암(白蓮庵) 중간에 있다. 서기 927년 절벽에 의지하여 돌을 쌓아 터를 닦고 세웠는데 그 규모는 금강산의 보덕굴(普德窟)을 연상케 한다. 1940년 현옹(玄翁)스님이 다시 중창하였다. 본래는 암반 위에 2칸(6평)으로 계획하고 공사를 하여 상량을 하려는데 목수 이화백(李花白)의 꿈에 백발장미(白髮長眉) 희랑대 노인이 “화백아, 화백아.” 하며 나타나 두 칸으로 지으면 대들보가 머리 위에 놓여 내가 머물 수 없으니 3칸으로 지어달라고 하여 그렇게 지었다 한다. 꿈에 나타난 노인은 바로 독성(獨聖)스님이었다.

희랑대에는 독성나반존자(獨聖那畔尊者)를 모시고 있다. 이 독성스님은 석가모니의 후신으로 깊은 불성(佛聖)을 가진 분이다. 희랑대의 독성스님은 영험, 영통하여 지성으로 소원을 올리면 한 가지 소원은 반드시 들어주는 것으로 예부터 이름이 난 곳이기도 하다.

해인사와 가야산을 유람한 선조들의 기록에도 희랑대와 희랑대사에 관한 내용이 나오고 있고 해인사를 유람할 때 꼭 들렀던 곳이 희랑굴(希郞窟)이었다. 가야산수기를 쓴 성해응(1760-1839)은 “희랑을 혹자는 천흉국(穿胸國)사람이라고 한다. 당나라 정원(貞元)년간(785-805)에 바다를 건너 동쪽으로 온 사람이다.”라고 하였으며, 유가야산기를 쓴 유척기(兪拓基,1691~1767)는 희랑대를 지날 때 승려가 “희랑대사가 항상 이곳에서 강의를 했지요. 그래서 각을 세워 희랑이라 이름을 붙였습니다.”라고 하였다. 1790년에 하진태(河鎭兌,1737~1800)가 쓴 가야산록에는 ‘희랑대는 희랑대사가 염불하던 곳으로 절벽의 위 층암의 나래에 나무껍질로 지붕을 이었다. 곁에는 칠성단이 있고 단 위에는 희랑대사가 앉았던 돌이 있으며 돌 위에는 큰 소나무 한 두 그루가 바위에 기대어 자라고 있다. 돌은 그것 때문에 갈라졌는데 이것이 가장 기이한 구경거리다.’라고 하였다. 희랑굴(希郞窟)로 불리던 희랑대(希郞臺)는 현존하고 있다. 불사를 일으켜 이전과 다른 모습이지만 깨끗한 도량이며 희랑대사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곳이다. 희랑대를 다녀간 수많은 기행문이 있으나 생략한다.

 

또한 그 당시에 희랑스님이 큰 명성을 대변하는 최치원의 시
‘증희랑화상贈希朗和尙’ 6편이 남아 있는데 <제1편>을 소개하면

금강 같은 참다운 지혜의 말씀 모아 步得金剛地上說
미륵보살이 철위산에서 대승경을 결집했네 扶薩鐵圍山間結
필추가 해인사에서 경전을 강하니 苾蒭海印寺講經
잡화가 이로부터 삼절을 이루리. 雜花從此成三絶

실존 인물인 희랑대사는 명실공이 우리 고장에서 태어난 훌륭한 승려이자 왕사이다. 위대한 위인인 희랑대사를 탄생시킨 고장임을 알리고 기리는 것은 모든 향토인들의 과제라 할 것이다.

거창군에서 서기 2019년 9월 거창군 주상면 희동마을에 희랑사를 건립하고, 2020년 5월에 탄신유지비를 세웠다.

【참고자료】
『거창군사』, 거창군사편찬위원회, 1997.
『가야산 해인사지』.


김 칠 성 / 거창향토사연구소 연구위원

출처
  • 거창향토사연구소